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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시나리오 베끼기

버닝 트리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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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업기념 화환들이 늘어서 있는 어느 마트 앞에 유통회사의 배달트럭이 도착한다. 키 큰 공기인형 허수아비가 팔다리를 꺽으며 우쭐우쭐 춤추고 있다. 그 옆에서 엉덩이만 간신히 가린 흰색 미니스커트를 입은 두 명의 나래이터 모델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유통회사 임시직인 20대 중반의 이종수가 트럭에서 내려 트럭 기사와 함께 매장 안으로 물건을 나르기 시작한다. 입구에서 춤추는 나레이터 모델 중 한 여자는 마이크로 지금 상품을 구매하면 고가의 개업기념 경품추천권을 드린다고 떠들고 있고, 한 여자는 계속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물건을 나르던 종수가 지나갈 때, 춤을 추던 젊은 여자가 그에게 몰래 경품 추첨권을 주며 작은 소리로 말한다.

"이따 추첨 받으세요"

물건 배달을 다 마쳤을 즈음에 매장 앞에서는 나레이터 모델들이 추첨통을 놓고 막 경품추첨을 하고 있고, 추첨권을 손에 든 사람들이 그 앞에 둘러서 있다. 추첨통을 놓고 막 경품추첨을 하고 있고, 추첨권을 손에 든 사람들이 그 앞에 둘러서 있다. 추첨통에서 하나씩 당첨된 번호를 꺼내 부르는 나레이터 모델과 종수의 눈이 마주친다. 그녀가 종수를 보고 웃는다. 종수는 그녀가 왜 자기를 보고 웃는지 좀 의아해 하는데, 추첨통에서 번호를 꺼낸 그녀가 놀랍게도 종수의 번호를 부른다.

상품은 연두색 플라스틱으로 된 스포츠용 손목시계다. "여자친구 있어?" 상품을 받아가는 종수에게 여자가 말을 건다. 마치 아는 사람에게 하듯이. 그러나 종수는 그녀가 낯설다.

"여자친구 없는데....."

"그럼 어떡해?" 여자용 손목시곈데.... 이제부터 구해야겠네."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여자가 자길 모르겠냐고 묻는다. "나야, 신해미." 그제야 종수가 그녀를 알아본다. 어릴 때 그들은 경기도 파주시 외곽의 같은 동네에서 살았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같이 다녔다. 그런데도 종수는 아직 믿기지 않는다. 해미가 말한다. 

"나 얼굴 성형했어. 예뻐졌지?"

알고 보니 그녀가 일부러 종수에게 추첨권을 주고 상품을 받도록 한 것이다. 트럭기사가 빨리 출발하자고 종수를 부른다. 트럭으로 돌아가는 종수에게 해미가 소리친다. 

"너 내일도 와? 난 며칠 더 여기서 이거 할 거야."

 

다음 날 물건을 나르고 있는 종수가 춤추고 있는 해미 옆을 지나간다. 해미가 그를 보고 웃는다.

두 사람은 잠시 짬을 내어 마트 뒤에서 같이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한다. 종수가 들고 있던 자판기 종이컵에 침을 뱉자 해미가 그 종이컵을 받아 가서 자기도 침을 뱉는다. 배꼽을 드러낸 그녀의 짧은 옷차림에 종수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시선을 자꾸 피한다.

해미 역시 종수처럼 알바 일을 하며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다. 몇 달 전부터 이벤트 회사에서 나레이터 모델 일을 하고 있는데, 다른 일보다 그나마 수입이 좀 낫다고 한다. 

"일이 있다고 전화가 오면 그때 나와도 되니까, 좀 자유가 있어. 그게 좋아."

어쩐지 그녀에게는 묘하게도 현실을 벗어난 듯한 천진난만한 단순함이 있다. 어릴 때 같은 동네에서 자란 사이인데도 해미 앞에서 종수는 숫기가 없고 소심해 보인다. 지방대학을 다니다말고 군대를 다녀온 뒤, 알바 일을 전진하면서 새 일자리를 찾고 있는 그에겐 가까운 친구도 없고 여자친구도 없다. 외로움과 무력감은 그에게 익숙한 감정이다.

"자꾸 보니까... 이제 좀 니가 해미 같네."

종수가 해미를 보며 웃는다. 소박해 보이는 웃음이다. 해미는 옛날에 자기가 그 웃음을 좋아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이거 너 찰래?"

종수는 해미에게 손목시계를 내민다. 경품으로 받은 여자용 손목시계다. 해미가 받아서 자기 손목에 차 본다. 손목시계는 처음 차 본다면서, " 헐, 촌스러워!" 감탄한다. 그러면서도 선물이 마음에 드는 듯 종수를 쳐다보며 웃는다. 해미는 들고 있던 종이컵을 담벼락에 슬쩍 올려두고는 즐거운 듯 마트를 향해 뛰어간다.

 

사흘 째 되는 날에도 그들은 마트 뒤에서 마주 서서 담배를 피운다. 종수는 해미에게 자기는 내일부터 오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정이 있어서 파주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야 해서 유통회사 알바 일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파주 집에는 누가 있느냐고 해미가 묻는다. 종수의 어머니는 어릴때 집을 나갔고(해미도 알고 있다), 누나는 몇 년 전 결혼해서 종수의 아버지만 혼자 소를 키우며 살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겨서 자신이 가야만 한다고 종수가 설명한다.

"무슨 문제냐고 안 물어보네?"

종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해미에게 종수가 말한다. 해미는 담배연기를 후 불며 종수를 쳐다본다.

"문제는.... 항상 있잖아."
두 사람은 말없이 담배를 피운다. 해미가 종수에게 묻는다.

"야, 오늘 저녁 같이 술이나 먹을까?"
종수가 조금 생각하다가 말한다.

".... 그럴까?"

 

술집에서 종수와 술을 마시는 동안, 해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귤을 까서 먹는 동작을 계속한다. 장난이 아니라 아주 진지하게. 그녀는 판토마임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그런 걸 왜 배워? 배우 되려고?"
"야, 배우는 아무나 되니?"
해미가 웃으며 반문한다.

"판토마임을 배워서 어디다 쓸려고? 배우를 하면, 잘해서 운이 좋으면 성공할 수도 있지만..."

"그냥... 좋아서 배우는 거야. 봐봐, 난 먹고 싶을 때 항상 귤을 먹을 수 있어."

그녀가 귤껍질을 까서 먹기 시작한다. 그녀의 왼쪽에 상상의 귤이 든 통이 있고, 오른쪽에는 상상의 껍질을 넣는 통이 있다. 그녀는 상상의 귤을 한 개 손에 들고서, 천천히 상상의 껍질을 벗겨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는다. 정말 맛있는 것 같다. 그리고는 상상의 찌꺼기를 내뱉고, 상상의 껍질로 감싸서 오른쪽 상상의 통에 집어넣는다. 그 동작을 되풀이한다.

"너 진짜 재능이 있는 것 같네."

종수가 감탄하자, 해미가 웃는다.

"이거 간단해. 재능이고 뭐고 할 것도 없어. 여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으면 돼. 그뿐이야. 중요한 거는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해미는 종수에게 그 동안 모아둔 돈으로 곧 아프리카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왜 하필 아프리카 여행이냐고 묻는 종수에게 그냥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단ㄷ.

딴 곳보다 아프리카에.

" 너 그거 알아? 아프리카의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부시맨들에게는 두 종류의 '굶주린 자'가 있대. 웃기지? 굶주린 자. 영어로 헝거."

아무래도 그녀의 영어 발음은 좀 어색하다. 해미도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래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래.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늘 알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배고픈 사람이라고, 그레이트 헝거라고 부른대."

"그래서 그레이트 헝거 만나려고 가는 거야? 아프리카로?"
종수가 웃으며 반문한다. 그는 아직 해미가 진짜로 아프리카에 가려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그런 종수를 쳐다보며 해미는 웃지도 않고 말한다. 

"멋있지? 그레이트 헝거..."

해미는 종수에게 부탁을 하나 들어달라고 말한다. 아프리카로 여행을 간 동안 그녀가 키우는 고양이에게 밥을 좀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종수가 고양이를 파주의 집으로 데려갈 수 있느냐고 하자, 그녀는 자기 집에 와서 밥을 줘야 한다고 대답한다. 고양이는 사는 곳을 옮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날 종수는 해미가 술에 취하면 아무 데서나 곧장 잠들어 버리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종수는 그런 그녀가 위태로워 보인다. 술에 취해 잠이 든 그녀의 얼굴은 뭐랄까, 뭔가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는 잠든 그녀에게 몰래 키스를 하려다 그마저도 차마 하지 못한다.

  다음 날 낮에 해미는 종수를 남산 아래 해방촌에 있는 그녀의 작은 원룸에 데려간다. 방에 들어서면서 그녀는 어질러진 물건들을 민망한 듯 부지런히 치운다. 종수로서는 여자 혼자 사는 방을 처음 들어와 본다. 그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한다. 침대 하나와 작은 싱크대가 있는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좁은 방에는 냉장고와 작은 옷장, 키 낮은 책꽂이, 책상을 겸한 식탁이 가구의 전부다. 책꽂이와 벽에는 몇 개의 사진도 있고, 여권사진 같은 단정한 얼굴의 증명사진도 있다. 북쪽으로 난 창문으로는 남산의 전망대가 보인다. 그녀의 방 안에는 하루 딱 한번 햇빛이 든다고 한다. 남산 전망대 유리창에 햇빛이 반사될 때 그 반사된 빛이 손수건 크기만큼 그녀의 방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잠시 들어오기 때문에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보일아, 보일아.... 형아 왔네? 나와 봐, 보일아...."

  그녀의 고양이는 이름이 '보일이'다. 지하의 보일러실에 버려져서 울고 있는 어린 고양이를 데려와 키웠다고 붙인 이름이란다. 그러나 좁은 방 어디에도 보일이는 보이지 않는다. 해미는 종수에게 보일이에겐 자폐증이 있어서 낯선 사람이 오면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종수는 그 보일이가 상상 속에 있는 고양이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래서 그는 해미에게 묻는다.

"보일이도 상상 속에만 있는 거 아냐? 내가 상상 속 고양이한테 먹이를 줘야 되는 거 아냐?"

"있지도 않은 고양이에게 밥 주라고 널 내방에 불렀다고?"

그녀가 소리 내어 웃는다.

"재밌네."

종수는 그녀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혼란스럽다.

"내가... 고양이가 없다는 걸 잊어야 돼?"

"종수야, 그래도...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거야."

해미가 그를 보고 알쏭달쏭한 미소 짓는다.

"어떤 것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게 너무 좋은 거 같아. 지금 니가 내 앞에 있는 거처럼..."

해미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고, 종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그는 그녀를 쳐다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다가간다. 해미가 보기에 종수가 몸을 좀 떨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녀가 먼저 그를 안고 입을 맞춘다. 두 사람은 함께 옷을 벗는다. 종수는 해미의 벗은 몸을 본다. 그녀의 몸이 너무나 완벽하게 아름다워서 차마 손을 대기도 두려운 것 같다. 사실상 종수에게 여자와 처음 해보는 섹스이다.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탐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종수는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간다.

  그 순간, 종수는 문득 침대 머리맡의 벽을 쳐다본다. 남산 전망대에세 반사된 햇빛이 들어와 벽에 걸려있다. 프리즘을 통과한 것처럼 엷은 무지개로 싸인, 손수건 크기 정도의 빛 조각. 해미의 몸을 안은 채 종수는 그 빛 조각을 마치 비현실적인 환영을 보듯이 말없이 보고 있다. 이윽고 그 빛은 서서히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는 더욱 그녀의 몸으로 깊이 파고든다.

 

 

  파주시 외과 어느 한적한 도로의 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와서 정차한다. 서울에서 오는 버스다. 종수가 배낭을 메고 버스에서 내린다. 그는 멀리 산자락에 보이는 작은 동네를 향해 걸어간다.

 

 

종수가 동네 위쪽에 있는 농가로 걸어온다. 담도 없는 낡고 허름한 집 옆으로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축사가 보이고, 온갖 자재들이 쌓여 지저분한 마당에는 제법 큰 물푸레나무가 눈에 띈다. 그 나무 아래 창고로 쓰는 녹슨 컨테이너가 있고, 컨테이너 앞에는 형편없이 낡은 픽업트럭 승용차가 한 대 서 있다.

  유리 새시로 된 마루문은 잠겨 있다. 그는 열쇠로 마루문을 열고 들어간다. 집은 꽤 오래 비어 있었던 것처럼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두어 개의 작은 방들은 다 무슨 물건들이 들어 차 있어서 빈자리가 없다.  사람이 거처할 만한 곳은 마루가 유일하다. 마루 한쪽에는 침대 겸용으로 쓰는 소파가 놓여 있고, 한쪽은 부엌 싱크대와 식탁이 있는데 온갖 잡동사니 같은 물건들이 방치되어 있다. 종수의 아버지는 먹고 자는 것을 다 마루에서 해결한 모양이다. 종수는 냉장고 문을 열어보고 음식물을 꺼내 냄새를 맡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벽에 붙은 사진 액자 하나를 보고 다가간다. 스무 살 무렵의 종수 자신의 사진이다. 그는 마치 의외의 물건을 보듯이 그 사진 앞에 오래 서 있다.

  종수는 다시 마루문을 열고 나간다. 마루문 앞 현관에는 낡은 장의자가 두어 개 놓여 있고,고목 뿌리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조잡한 목공예품 같은 것들도 놓여 있다. 그는 집 옆에 축사에도 가본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낡은 축사는 제법 커 보이지만 텅 비어 있고, 비쩍 마른 소 한마리만 남아 있다. 그는 소에게 사료를 준다.

 

 

  집 안으로 들어온 종수는 마루에 있는 소파의 등받이를 펴고 대충 잠자리르 만든다. 다른 가구나 물건들과는 좀 어울리지 않은 멀쑥한 디지털 TV가 보인다. 그는 리모컨으로 TV를 켜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본다. 채널들은 무수히 많다. 이윽고 그는 어느 떠들썩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한다.

 

 

아침에 종수가 혼자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다. 켜져 있는 TV소리가 들려온다. 밥을 먹으며 간간이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누군가에게 문자를 하기도 한다. 

  싱크대에 먹은 그릇들을 치우고 있는 종수. 냉장고 위에서 자동차 키를 발견한다. 차 키를 가지고 마당으로 나가 컨테이너 앞에 세워져 있는 낡은 픽업트럭에 올라탄다. 그리고 시동을 걸어본다. 엔진소리는 거칠지만, 시동은 걸린다. 

 

 

해방촌 언덕 바지 좁은 골목길에 있는 해미의 집 앞에 종수의 픽업트럭이 서 있다. 종수가 해미의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끌고 집에서 나오고, 검은 선글라스를 머리에 얹은 해미가 따라 나온다. 

"헐!"

종수의 차를 보고 해미가 감탄한다.

"완전 똥차!"

말해놓고 미안한 듯 그녀는 웃으며 종수를 쳐다본다. 해미의 여행용 가방을 픽업트럭의 짐칸에 실은 뒤 두 사람은 공항으로 출발한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 두 사람은 알바 일에 대한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두 사람 다 꽤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일은 시간당 얼마며, 애로사항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한다. 마치 해미가 지금 해왜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라, 직업소개소에서 만난 친구끼리 알바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제가 끊어진다. 두 사람 다 침묵 속에 앉아 있다.

 

앞 차창으로 인천공항 청사가 보이고, 이륙하고 있는 비행기도 보인다. 해미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직는다. 하늘로 날아가는 비행기와 다가오는 공항 풍경을 찍다가 핸드폰을 돌려 셀카를 찍는다. 자신의 모습과 뒤쪽으로 종수의 모습도 나오게. 종수는 모른 척하고 있지만, 분명히 사진 찍히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해미가 핸드폰 렌즈를 향해 미소 짓는다.

 

 

취업공고를 낸 파주시에 있는 어느 중소기업에 찾아온 종수. 회사 직원들 앞에서 면접을 본다. 회사 직원들이 그에게 이것저거 물어본다. 그 물음에 대답을 하면서 이미 그는 자신이 취업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대졸자도 아니고 공고에난 전공자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지원을 한 것은 회사가 파주에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자신을 대하는 회사 직원들의 태도에서 그는 모욕감을 느끼지만, 감정을 숨기고 있다.

 

 

  그는 해미의 집으로 간다. 해미와 약속한 대로 보일이에게 밥을 주기 위해서다. 좁은 삼층 계단을 올라가 해미가 가르쳐 준 번호 키를 누른 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오늘도 보일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침대 밑에 고양이밥을 내놓는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서 해미가 없는 방에서 해미가 살던 삶의 흔적을 바라본다. 방바닥과 침대 위에는 벗은 옷들이 팽겨쳐 있고, 싱크대에는 설거지거리가 그대로 있다. 종수는 냉장고도 열어보고, 할일 없이 작은 옷장 속의 옷드 들춰 보고 벽에 붙은 스냅사진들도 들여다 본다. 그리고 그는 어질러진 물건들을 치우고,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기 시작한다.

  침대 밑에서 점박이 고양이가 소리 없이 나와 먹이를 먹고 있다가 종수가 돌아보자 재빨리 숨어버린다. 종수는 고양이를 보지 못하지만 자기가 내놓은 고양이밥이 줄어든 것을 알아차린다. 비로소 그는 보일이가 상상 속의 고양이가 아닌 것을 알게된다. 허리를 굽혀 침대 밑을 들여다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보일이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다. 혼자 보일이에게 말할 때 이외로 그는 꽤 유머감각이 있는 것 같다. 

 

 

종수는 파주 시내에 있는 어느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간다. 꼭 부동산중개소 사장 같은 인상의 나이든 변호사는 최근에 공무원 퐁행죄로 구속된 종수 아버지의 담당 병호사이다. 그는 이런 일이 다 종수 아버지가 '성질이 지랄 같아서' 생긴 일이고, 피해자한테 사과하고 반성문도 쓰고 판사한테 동네 주민들 탄원서도 올리고 해야 그나마 선처를 바라볼 수 있는데, 성질이 지랄 같은 아버지가 안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어서 문제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고등학교 동창인 변호사는 종수의 신상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요즘 젊은 애들은 힘든 일 안하고 중소기업엔 죽어도 안 가고 대기업이나 가려고 한다는데 너도 그러냐'고 묻는다. 그리고 마치 자기 아들처럼 잔소리를 한다.

"니가 아버지 면회 가서 이야기 잘 좀 해봐. 성질 좀 죽이고 반성문 쓰시라고."

그러나 종수는 대답이 없다.

"내일이라도 당장..., 알았지?"

"....."

종수가 대답이 없자, 변호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본다. 종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해미 집을 찾아온 종수는 번호 키를 눌러보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해미가 아프리카로 떠나고 보름쯤 지났지만, 여전히 보일이는 어디론가 숨어서 나오지 않는다. 그는 빈 먹이 그릇에 고양이밥을 놓아둔다.

해미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종수. 창밖으로 보이는, 멀리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하게 솟아있는 남산 전망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책꽂이에 붙은 해미의 사진으로 옮겨 간다. 가슴이 거의 드러날 것 같은 나래이터 모델 의상으 입은 해미가 그를 보고 웃고 있다.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남산 전망대를 본다. 그 자리에 앉은 자세로 그는 몸을 움직여 바지를 내리고 자위를 하기 시작한다.

  자위를 하는 종수의 뒷 모습. 좁은 방의 정적 속에 들릴락 말락 피부가 마찰하는 듯한, 옷과 허리띠의 버클이 스치는 것 같은 소리와 그의 여린 숨소리가 이어진다. 이윽고 절정에 이른 순간, 왠지 그의 표정은 쾌감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잠시 침묵 속에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눈을 뜬다. 발밑에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가 이 방에 와서 처음 듣는 고양이 소리다. 보일이는 그의 다리에 몸을 갖다 댄다. 마치 그를 위로라도 하듯이.

  전화가 걸려온다. 해미의 전화다. 지구 반대편에서 전해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좀 들 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지금 케냐의 나이로비 공항에 있는데,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서 사흘째 공항안에 발이 묶여 있었다가 드디어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면서 종수에게 인천공항으로 나와 달라고 말한다.

 

 

  종수는 낡은 픽업트럭을 몰고 인천공항으로 그녀를 마중 나간다. 그런데 출국장을 나오는 해미는 30대 중반의 웬 남자와 동행하고 있다. 나이로비 공항에서 사흘 동안 공항 안에 갇혀 함께 대기하면서 친해진 남자라고 했다. 그 남자는 종수에게 자신의 이름을 '벤'이라고 소개한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답게 까맣게 탄 얼굴이지만 매우 잘생긴 얼굴이다. 그는 관광상품 같은 원색의 아프리카 전통 의상 같은 것을 걸치고 있고, 목에는 짐승의 이발로 만든 것 같은 토산품 목걸이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튀거나 유난스러워 보이지 않고 왠지 그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종수는 순간적으로 그가 아프리카를 다녀온 한국 관광객이 아니라 정말 아프리카 원시세계에서 온 낯선 존재 같다는 착각을 느낀다.

  해미는 배가 고프다고, 오랜 만에 한식을 먹고 싶다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곱창전골을 먹고 싶단다. 그러자 벤이 곱창전골 잘 하는 집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해미는 그 집에 가자고 맞장구 친다. 두 사람은 마치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같이 식사하러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럴 거면 해미가 왜 자기를 공항까지 나오라고 했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종수는 그런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다.

  공항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종수의 뒤로 달달달 여행용 가방이 끌리는 소리가 따라온다. 말없이 혼자 걸어가는 종수의 뒤를 벤과 해미가 몇 걸음 뒤에서 따라가고 있다. 두 사람은 시종 즐거운 듯이 키득거리며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벤의 옷차림을 보고 힐끔거리기도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주차장에 세워둔 종수의 낡은 픽업트럭에 도착하자, 벤은 이런 차종을 정말 오랜만에 본다고 감탄하며 몇 년도에 나온 차냐고 묻는다. 마치 그 트럭이 종수가 수집한 빈티지 차라도 되듯이. 종수는 정확한 건 모르겠고 아버지가 자신이 초등학교 오학년때 차를 산 것은 기억한다고 대답한다.

"귀엽네!"

  벤은 혼자 감탄하며 감상하듯 차를 본다. 종수는 그의 말이 진심인지 의심스럽다. 픽업트럭의 짐칸에 두 사람의 여행가방을 실은 뒤, 세 사람은 함께 차를 타고 떠난다. 종수의 옆자리에 해미가 앉고 벤은 뒷자리에 앉았다.

  운전을 하고 가며 종수는 룸미러에 비친 벤의 모습을 본다. 벤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아마 가까운 친구와 하는 듯 농담을 섞으며 킬킬거리고 웃기도 한다. 그의 웃음소리는 뭔가 좀 들뜬 듯한 특이한 웃음소리다. 대화의 내용도 친한 친구끼리 말할 때 남자들이 흔히 그렇듯 어린애처럼 유치하다. 그런 벤의 모습은 첫 인상과 왠지 아주 다르게 느껴진다. 차 안에는 통화하는 벤의 목소리만 들린다. 해미는 해미대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고, 종수는 여전히 룸미러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

 

 

  강남에 있는 어느 곱창전골 전문식당에서 세 사람은 식사를 한다. 청담동 골목에 있는 그 식당은 벤이 자주 오는 장소인 듯하다. 그는 카운터의 주인과도 인사를 하고 서빙을 하는 아줌마와도 농담을 주고받는다. 자기 집처럼 편안해 하고 자연스러운 벤에 비해 종수는 왠지 이곳이 불편하고 어색하다.

  식사를 하며 벤은 종수와 해미에게 아프리카의 정세와 환경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그는 참 아는 것도 많은 것 같으데, 잘난 척하는 게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듯 알기 쉬운 말로 들려준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해미는 하품을 하더니 어느 새 잠들어 버린다.

"귀엽죠?"

  벤이 웃으며 종수에게 말한다.

"졸리면 장소 안 가리고 그냥 잠자는 게 버릇이죠."

  종수는 벤이 자기한테 그녀의 버릇을 이야기하는 게 왠지 거슬리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귀엽다'고 하는 것은 벤의 말버릇인 것 같다. 그에게 마음에 드는 것은 다 귀여운 것이다. 마치 그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귀여운 것과 귀엽디 않은 것으로 나누어진다는 듯이.

  종수가 벤에게 아프리카에 대해 그렇게 잘 아시니 아프리카와 관계된 무슨 일을 하시느냐고 물어보자, 벤은 자기는 그냥 아프리카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아프리카 땅에 내리면요, 어떤 냄새가 나요. 노린내 같기도 하고, 무슨 과일이 썩어가는 냄새 같기도 한...... 그런 이상한 냄새. 그게 무슨 냄샌지 알아요? 사람 살냄새예요. 사람 살. 근데 나는 그 냄새가 너무 좋아요."

  그 이야기를 할 때 벤의 두 눈은 이상하게 생기에 차서 반짝이는 것 같다. 종수가 벤에게 실례지만 무슨 일 하느냐고 묻자, 벤은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한다고 대답한다. 무역 같은 것이냐고 묻는 종수에게 벤은 빙긋 웃으며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슨 무역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의 후배라는 친구가 다가오더니 "형, 차 이 앞에 대놨어요."라며 차 키를 건넨다. 차 키를 받아들고 벤이 종수를 쳐다본다. "술 더 하고 싶으세요?"

  그의 표정이 너무 선의에 차 있어서, 그 말이 그만 일어나자는 뜻이란 걸 알아차리지 못할 뻔했을 정도다. 종수는 해미를 깨운다.

 

 

  식당을 나왔을 때, 벤은 식당 앞에 세워져 있는 외제 스포츠카로 다가간다. 마치 그에게 저절로 반응하듯 차의 불이 들어오며 두 개의 사이드 미러가 소리 없이 펄쳐진다. 종수는 비로소 멋진 디자인의 그 은색 스포츠카가 벤의 차임을 알게 된다. 종수의 낡은 차와는 너무 대조적이다. 종수가 자신의 낡은 픽업트럭 짐칸에서 벤의 짐을 내린다. 해미의 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해미를 쳐다보자, 벤이 자기 차로 해미를 집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해미가 종수를 쳐다보다가 말없이 자기 가방을 종수의 차에서 벤의 차로 옮겨 싣는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벤이 종수에게 손을 내민다. "예, 저도요." 종수가 그 손을 잡는다. 벤이 종수를 향해 왠지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짓는다. 해미는 종수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벤과 함께 스포츠카를 타고 떠난다.

 

 

  종수는 동네 이장 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판사에게 제출할 탄원서에 서명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이장은 썩 호의적이지 않고 종수의 아버지와 가까웠던 것 같지도 않다. 이장은 종수의 아버지가 '별로 얘기도 못 해본 사람'이고, '동네사람들하고는 뭘 해도 항상 따로 놀던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어쨋든 탄원서에 서명을 해주는 이장에게 종수는 집에 한 마리 남은 소를 팔려고 하는데 살 만한 사람이 있겠는지 물어본다. 이장과 이야기하는 동안 해미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강남의 어느 카페에 종수가 해미를 만나기 위해 들어선다. 창가 자리에 앉은 해미가 그를 보고 손을 흔든다. 자리에 앉은 종수는 테이블에 두 사람의 커피 잔이 놓여 있는 것을 본다.

"......누가 또 있어?"

  종수가 묻자, 해미가 통유리로 된 창밖을 가리킨다. 통유리창 너머 카페 뜰에서 통화를 하고 있던 벤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종수에게 손을 흔든다. 종수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한다.

"종수씨, 반갑네요." 자리로 돌아온 벤이 종수와 악수한다.

"해미가 종수씨 보고 싶다고 해서......"

"아니, 내가 너 이야기했더니 오빠가 자꾸 부르래."

  종수는 말없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다. 그는 자신이 왠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와 있는 것처럼 느낀다. 강남의 이 세련되고 우하한 카페 안의 분위기도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벤과 해미는 하던 이야기를 계속한다. 종수가 오기 전에 둘이서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스파게티는 면을 삶은 뒤 찬 물에 헹구면 절대 안되고, 재료들을 볶을 때에는 굳이 이파리를 같이 볶지 않고 위에 살며시 얹어만 주고 하는 식의 얘기들을 벤이 하고 있다. 종수가 들어보니 벤은 해미에게 여러 종류의 파스타에 대해 맛깔나게 설명해주고 있는 중이다. 그는 마치 이태리 파스타의 전문가처럼 '엔초비 파스타'니 알리오올리오'니 '바질 페스토'니 하는 음식 이름과 함께 그 맛에 대해서도 묘사한다. '꽉 찬 것 같은데 뭔가 섭섭한 맛', '알고 보면 야한 맛' 등등. 벤의 그런 설명을 들을 때마다 해미는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거리고 웃는다. 두 사람은 재미있게 웃으며 이야기하는데 종수 혼자 말없이 앉아 있다. 그래서 세 사람의 모습에는 기묘한 어색함과 텐션이 있다. 벤은 종수에게 마치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듯이 변함없이 잘 대해준다. 종수보다 나이가 일고여덟 살이 더 많은데도 '종수씨'라고 부르고 깍듯한 경어를 쓴다. 그는 인간적이고 친절하다. 그러나 왠지 순간적으로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해미를 깔깔거리고 웃게 해놓고도 자신은 문득 공허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빠가 집에서 맛있는 거 해준대."

  해미가 종수를 보며 말한다.

 

 

  로시니의 <도둑까치 서곡>이 흘러나오고 있다. 벤이 음악에 맞춰 휘파람을 불며 스페게티를 삶고 있고, 종수와 해미는 거실에서 벤의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복도식 주방과 아담한 거실, 그리고 욕실과 방이 하나 딸려 있는 별로 평수가 넓이 않은 빌라에서 벤은 혼자 살고 있는 모양이다. 그곳은 종수가 사는 공간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음은 분명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예쁘고 세련되어 보인다.

  종수가 해미에게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아냐고 작은 소리로 묻는다. 그러자 해미가 큰소리로 벤에게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벤이 손가락으로 복도를 가리키며 복도 끝에 있다고 말한다. 종수가 일어나 화장실을 찾아간다.

  화장실이라기보다 욕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릴 만한 깨끗하고 밝은 공간. 별나게 화려하진 않으나 바닥이 마루로 된 서구 스타일이어서 그런지 이국적으로 느껴진다. 변기 물을 내린 뒤 종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왠지 자신의 얼굴조차 낯설게 느껴진다. 장식장이나 벽에 붙은 작은 액자나 수건걸이에 걸린 깨끗한 수건조차 낯설다. 그는 선반장식장 문을 열어본다. 마치 몰래 금지된 행위를 하는 것처럼 긴장한 얼굴이다. 안에는 하얗게 세탁된 수건들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알 수 없는 화장품과 약병 같은 것들이 보인다. 종수는 다시 선반장식장 문을 닫고 화장실을 나온다.

 

 

  식사를 마친 뒤 종수와 해미는 벤의 집 베란다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언덕 위에 있는 벤의 집 베란다에서 방배동 조용한 주택가 풍경이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 이제 막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고층건물들이 보인다. 종수는 해미에게 벤이 젊은 나이에 어째서 이렇게 여유 있게 살 만큼 돈이 많은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해미는 말없이 담배만 피운다.

"저 사람 무슨 무역해?"

"무역?"

  해미가 반문한다.

"무역 일 한다던데?"

"그렇게 말해?"

"그렇게 말했어, 나한테."

"그럼, 그런가 보지. 일 별로 안 하는 것 같던데...... 항상 놀고 있는 것 같던데, 일은 언제 해?"

  오히려 해미가 종수에게 되물으며 웃는다. 거실 창 너머로 식탁을 치우고 있는 벤의 모습이 보인다. 뭔가 즐겁고 흥겨운 듯한 표정이다.

"저 사람이 왜 너를 만나? 그거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종수의 물음에 해미가 쳐다본다. 마치 그런 걸 왜 생각해야 하느냐는 듯한, 어린 아이 같은 맹한 표정이다.

"오빠가..... 나 같은 사람 좋아한대. .....흥미 있대."

"저 사람 성이 뭐야?"

"성...... 몰라. 그냥 벤이라고 부르래. 그래서 그냥 벤 오빠라고 물러."

 

 

  종수는 어느 와인 바에 앉아 있다. 벤과 벤의 친구들이 만나는 자리에 해미와 함께 와 있다. 아마도 벤이 부정기적으로 자리를 같이하는 친구나 후배들인 것 같은데, 하나같이 벤처럼 여유 있고 세련된 사람들로 보인다. 의사도 있는 것 같고, 펀드 매니저나 드라마 작가도 있고, 결혼을 앞둔 커플도 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는 종수는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모두 해미를 보고 있고, 해미는 지금 열심히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느낀 것, 자연의 법칙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을 열심히 말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인간의 삶도 자연 현상의 한 부분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도 강한 인간이 약한 인간을 잡아먹는다. 아프리카 초원이나 서울이나 똑같다. 자연에는 '따뜻함'이 없는 것 같다. 만약 신이 있다면, 자연에 왜 따뜻함이 없을까.

  벤의 친구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재미있다는 듯이 듣고 있다. 가끔씩 맞장구를 치거나 물어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해미가 "자연에는 따뜻함이 없는 것 같아요." 하면, 누군가 "음...... 모성? 모성은 따뜻함이지 않아요?" 하는 식이다. 그러면 해미는 더욱 힘을 내서 자기 생각을 말한다. 그러나 종수는 해미가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순진하고 유치한 이야기를 열심히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벤의 친구들은 그런 그녀를 재미있는 구경거리 보듯 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는 것이 왠지 더 기분 나쁘다. 종수는 벤을 본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벤은 어쩐지 권태롭고 공허한 표정인 것 같다.

  "자리 옮길까?"

  벤의 말에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선다. 그들을 따라 나오며 종수는 괜히 해미의 옷차림에 대해 화를 낸다.

 

 

  클럽에서 벤과 벤의 친구들이 음악에 맞춰 춤추고 있다. 해미와 종수도 함께 춤을 춘다. 사람들은 서로 몸이 닿을 정도로 비좁게 서서, 손에 든 술잔의 술을 마시기도 하면서 몸을 흐느적거리고 있다. 비좁게 선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해미의 춤 솜씨는 벤의 일행들을 자극하는 것 같다. 그들은 해미를 둘러싸고 몸을 흔들면서 해미의 춤을 보고 있다. 그런 그들과 해미를 보다가 종수는 그 자리를 떠난다. 사람들을 헤치고 혼자 클럽을 나가는 종수의 모습을 벤이 보고 있다.

 

 

  종수가 축사 안에 하나 남은 소에게 사료를 주고 있을 때, 해미에게서 전화가 온다. 지금 벤과 함께 찾아가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마침 근방을 지나가고 있던 참인데, 벤이 종수가 사는 곳에 와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종수의 집 마당으로 지붕을 올린 벤의 스포츠카가 들어온다. 해미가 종수를 보고 두 팔을 휘저으며 요란하게 손을 흔든다. 지저분한 마당에 들어온 그 은색 스포츠카는 마치 불시착한 ufo처럼 이질적으로 보인다. 차에서 내리는 해미는 유두 모양이 확실히 보일 정도의 얇은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다. 해미는 고개를 쳐들어 마당에 있는 나무를 쳐다본다.

"나무가 많이 컸네."

  그녀는 어릴 때 이 나무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녀의 기억에 종수가 항상 이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나무를 쳐다보는 해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어려있다. 종수도 함께 나무를 쳐다본다.

  해미는 자기 집이 없어져서 섭섭하다고 말한다.

  "저어기...... 저기였는데...... 흔적도 없어졌어."

  그녀는 종수의 집 아래쪽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벤이 뒷자석에서 커다란 봉투를 꺼낸다. 로스트비프 샌드위치와 샐러드, 훈제 연어와 블루베리 아이스크림. 와인도 있다. 집 안이 지저분하고 앉을 데도 없어서 종수는 마루문 앞 현관에 컨테이너에서 꺼낸 테이블과 의자를 놓는다.

"안에 들어가봐도 돼?"
  해미의 물음에 종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마루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아 종수가 안으로 들어가 본다. 그녀는 마루에 선 채 지저분한 실내를 둘러보고 있다.

"꼭  우리 집에 온 거 같네. .....옛날 집."

  그들은 현관 앞 장의자에 앉아서 오랜 만에 만난 사이좋은 친구들처럼 함께 식사를 한다.

"분위기 나쁘지 않네요."

  벤의 말에 해미가 맞장구친다.

"소똥냄새가 좀 나서 그렇지."
  세 사람이 함께 웃는다.

 

 

  식사를 하고 난 뒤 세 사람은 마당의 평상과 낡은 장의자에 앉아 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멀리 들판에는 비닐하우스들이 희뿌옇게 빛나고 있고, 그 위로 노을이 지고 있다. 노을이 지는 하늘은 그런대로 아름답다. 벤이 종수에게 자기는 지금 '그래스'를 하고 싶은데 같이 하겠느냐고 묻는다. "그래스?" 무슨 말인지 몰라 종수가 해미를 돌아본다. 해미는 말없이 그를 보며 웃는다.

"대마초요."

  벤의 대답이 종수를 당황하게 한다. 그는 다시 해미를 돌아본다.

"난 그거 피우면 자꾸 웃음이 나."

  해미가 하는 말이다. 종수는 조금 망설이다가 결국 손을 내민다.

  벤은 알루미늄 호일로 싼 대마초를 담배 종이에 말아 불을 붙인다. 종수는 벤이 피우는 모습을 바라본다. 벤은 대마초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고 10초쯤 있다가 천천히 뱉어낸 뒤, 종수에게 건네준다. 종수는 벤이 하는 대로 따라하고 나서 해미에게 건네준다. 해미도 별로 어색하지 않게 피운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대마초를 한 모금씩 피우고 차레대로 돌린다.

  벤이 마당에 세워 둔 스포츠카에 가서 카오디오를 켠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Lift to the Scaffold'가 흘러나온다.

  음악에 이끌리듯 해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티셔츠를 벗어던져 버린다. 기울어지는 햇살에 그녀의 맨 젓가슴이 드러난다. 늦가을 공기가 쌀쌀해서 유듀와 작은 돌기들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그렇게 가슴을 드러낸 체 그녀는 음악에 맞춰 팬터마임 동작을 하기 시작한다. 종수는 몽롱한 시선으로 춤을 추둣 팬터마임을 하는 해미를 바라본다. 벤이 낮게 킬킬거리며 웃는다. 마일스 데이비스 'Lift to Scaffold'가 무한반복 되는 것처럼 흘러나온다. 해미는 그 트럼펫 선율에 맞춰 마치 춤추는 인형처럼 흐느적거리며 팬터마임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다가 대마초에 취한 듯 갑자기 의자에 주저앉더니 움직이지 않는다.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종수는 벤과 함께 가슴을 드러낸 채 시체처럼 잠든 그녀를 들어 안으로 옮겨 눕힌다. 벤은 머리 쪽을, 종수는 다리를 들고 마루에 있는 소파로 옮기는 동안, 그녀는 푸우푸우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을 뿐이다. 벤이 재미있다는 듯이 킬킬거리고 웃는다. 벤의 그 독특한 킬킬거리는 웃음이 뭔가 종수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종수는 소파에 누운 해미에게 그녀가 벗어던지 셔츠를 가져다가 벗은 상체를 가리고 담요까지 덮어준다. 그리고 다시 벤과 함께 장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음악을 들으며 계속 대마초를 피운다. 종수는 몽롱한 환각 상태에서 밴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어릴 때부터 자기가 얼마나 아버지를 미워했는지에 대하여.

"우리 아버지는 분노조절 장애가 있어요."

  그의 어머니가 어린 남매를 두고 집을 나간 것도 그것 때문이다. 아버지는 기업형 축산업을 한다며 무리하게 빚을 내서 축사를 짓고 소와 돼지를 키우다가 가축값은 폭락하고 사료값은 오르면서 망하고 말았다. 가축도 없는 빈 축사의 폐수 정화시설이 안되어 있다고 벌금이 나오자, 항의하러 시청에 갔다가 공무원을 폭행하여 구속되고 말았다. 종수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한 마리 남은 소에게 사료를 먹이기 위해서였다. 이곳에 돌아와서야 그는 자기가 아버지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이곳이 얼마나 싫은지 깨닫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종수는 마치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는 고백처럼 말한다.

"난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워요."

  말없이 듣고 있던 벤이 불쑥 말한다.

"뭐라구요?"

  멍하게 있다가 종수가 되묻는다.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종수는 고개를 돌려 벤을 쳐다본다. 그의 입에서 빠져나온 연기는 마치 눈에 보이는 심령처럼 어떤 형상을 만들었다가 풀어지며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가 종수를 돌아본다. 대마초에 취해서일까, 그 역시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것을 고백하고 싶어하는 표정을 하고 있다.

  벤이 다시 입을 연다. 그는 가끔 들판에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는 것이다. 농작물을 재배하지 않고 버려져 있거나 허접쓰레기 같은 것을 넣어둔 헛간으로 쓰이는 낡은 비닐하우스를 골라 하나씩 태운다는 것이다.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만 태우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해가 되거나 아프게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무익한 비닐하우스는 불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면서 희열을 느낀다는 것이다.

"아주 간단해요, 진짜. 석유를 뿌리고 성냥불만 던지면.....(엄지와 검지를 경쾌하게 튕기며) 끝! 전부 다 타는 데까지 십오 분도 안 걸려요."

  그리고 다음번에 태울 비닐하우스도 이미 정해 놓았단다. 지금 종수가 사는 곳에서 아주 가까운 데 있는 비닐하우스라고 했다.

"난 이미 다 봐뒀어요. 여기서 아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요."

  그 말을 하며 벤은 종수에게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는다.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벤의 입에 물린 대마초의 끝이 빨갛게 타들어간다. 어스름 속에서 그것은 기묘한 발광체처럼 보인다. 종수는 그 빨간 발광체를 말없이 보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연다.

"난 해미를 사랑하고 있어요."

  대답이 없다. 종수는 어스름 속의 그 빨간 빛을 보며 기다린다. 그러나 벤은 아무 말이 없다. 다만 그 빨간 빛이 다시 더욱 밝은 빛으로 타오를 뿐이다. 

"......씨발, 해미를 사랑한다고."

  종수가 그 빨간 빛을 향해 다시 말한다. 그러나 역시 대답이 없다. 대신 나지막하게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대마초에 취해서 내는 웃음 같기도 하고, 종수의 말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다. 종수는 어스름 속의 그 빨간 빛을 바라본다. 그의 눈에서 격렬한 적의가 타오른다. 그때 마루문이 열리고 잠에서 깨어난 해미가 나온다.

 

 

  벤과 해미가 떠나고 있다. 차에 타기 전 해미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머리 위를 쳐다본다. 종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머리 위를 쳐다본다. 그녀는 마당에 있는 커다란 물푸레나무를 쳐다보고 있다. 바람에 물푸레나무 잎들이 소리 내며 흔들린다.

"인제 비닐하우스르들을 잘 살펴봐야겠네요."

  종수가 차에 타는 벤에게 인사 삼아 웃으며 말한다.

"그러세요." 그도 종수를 쳐다보며 웃는다.

"아주 가까운 데 있는 거."

"비닐하우스가 뭐? 무슨 얘기야?"

  벤도 종수도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을 기다리듯 두 사람을 쳐다보던 해미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차에 올리탄다. 무엇 때문인가, 그녀는 말없이 앞만 보고 앉아 있다. 올 때는 종수를 향해 두 팔을 흔들었는데, 지금은 종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벤의 은색 스포츠카가 떠난다. 종수는 지구를 떠나는 ufo를 보듯 멀어져가는 차를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서 있다가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소파 위에 쓰러지듯 누워 잠든다.

 

 

  어둠 속에서 종수가 뭔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얼굴이 붉은 빛으로 일렁거리고 있다. 그의 두 눈에도 불길이 담겨 일렁거리고 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불타고 있는 비닐하우스를 보고 있다. 불길은 소리 없이 치솟고, 불티들이 어지럽게 날아오른다. 불길 속에서 타다 남은 아치형의 검은 쇠골조가 쓰러지고 이윽고 비닐하우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종수가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자신이 어제 저녁 소파에 누웠던 차림 그대로 잠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루문을 열고 나와 본다. 날이 차츰 밝아오고 있다. 현관 앞 장의자와 테이블 위에는 어제 그들이 왔다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음식찌꺼기와 테이블 위에 핏자국처럼 쏟긴 붉은 포도주, 그리고 대마초 부스러기가 어제의 일이 꿈이나 비현실이 아니라 분명한 현실이었다는 증거처럼 남아 있다. 어디선가 새들이 지저귀고 멀리 여명 속에 희뿌옇게 비닐하우스들이 보인다.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로 난 도로를 종수의 낡은 차가 달리고 있다. 벌판 한가운데 오래된 비닐하우스가 보이고, 종수의 차가 선다. 종수가 차에서 내려 비닐하우스 가까이 걸어간다. 비닐하우스 안을 유심히 들여다본 다음, 지도를 꺼내 표시를 한다. 좁은 길까지 나와 있는 2만분의 1 지도에는 이미 여러 개의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비닐하우스는 오래 방치된 듯 아주 지저분하다. 그는 동그라미 표시 위에 다시 x표를 한다.

 

 

  어느 작은 동네 가까이 있는 비닐하우스들. 종수의 차가 다가와 선다. 커다란 비닐하우스 여러 동이 있고, 한눈에 보아도 현재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수는 운전석에 앉은 채 지도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고 차를 출발 시킨다.

 

 

  또다른 비닐하우스 가까이 차를 세우고 비닐하우스로 걸어가는 종수. 근처 농가에서 사납게 짖어대는 개 소리가 들린다. 비닐하우스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의 휴대폰이 울린다. 전화기 액정화면에 '해미'라는 이름이 떠있다.

"종수야, 오늘 좀 만날 수 있어? 가능한 한 빨리....."

  전화기를 통한 그녀의 목소리가 좀 다급하게 들린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좀..... 뭔가 이상한 게 있어서....."

  종수가 그게 뭐냐고 물어도 해미는 왠지 선뜻 대답하지 않는다.

".....아냐. 나중에 이야기해. 내가 좀 바보 같지?"

  그녀는 나중에 다시 전화 하겠다며 전화를 끊어버린다.

 

 

  비닐하우스를 다 돌아본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 마당에 차를 세우고 지도를 펴본다. 지도에 표시된 동그라미가 열여섯 개, 그리고 x표시가 된 것이 다섯 개다. 그 다섯개가 벤이 태울 만한, 방치된 채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듯한' 비닐하우스인 것이다. 그는 펜으로 지도에 있는 그 다섯 개의 지점을 선으로 연결해본다. 산과 개천과 언덕을 따라 구불구불 굽어 있는 지도 위의 선.

  그는 해미에게 전화를 건다. 긴 신호음 뒤에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느니....."라는 안내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다음 날 아침 여섯 시. 마당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종수. 그의 얼굴과 목을 적신 땀이 바닥에 떨어진다. 지금까지 늘 무력감에 빠져 있던 그가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적한 도로 위를 종수가 추리닝에 운동화를 신고 달리고 있다.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았다. 새벽 어스름 속의 풍경은 나쁘지 않다. 기차 건널목도 지나고 작은 초등학교도 지나고, 논과 밭 사이로 난 인적이 없는 농로를 달린다. 그는 추리닝을 입고 조깅하듯 달리고 있지만, 주변 풍경이나 그가 달리는 길은 어느 모로 보나 조깅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들판 한가운데에 첫 번째 비닐하우스가 있다. 그는 달리는 속도를 줄이고 비닐하우스 쪽으로 다가간다. 바람이 불어 주변의 나무들이 소리 내며 흔들린다. 걸어가며 그는 주위를 둘러본다. 이곳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너무나 잘 아는 공간이다. 그런데도 마치 난생 처음 보는 낯선 공간인 것 같다. 눈앞의 비닐하우스에는 아직 방화의 흔적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두 번째 비닐하우스는 작은 동네 가까이 있다. 주변이 유별나게 지저분하고, 비닐하우스에 접근하려면 질척하게 젖어있는 땅을 지나야 한다. 운동화가 진흙에 젖어서 더럽혀진다. 종수가 비닐하우스로 가까이 걸어가는 동안 가까운 농가의 개가 사납게 짖어댄다. 그는 스스로가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숨겨진 범죄를 조사하는 형사가 된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비닐하우스를 살펴보고 다시 걸어 나오는 종수를 늙은 동네사람이 지켜보고 있다.

"뭐 해요?"

"예?"

"뭐 하냐고요."

"그냥..... 살펴보는 거예요."

  늙은 농부는 종수의 뒷모습을 의심스런 눈길로 보고 있다.

 

 

  종수는 이제 강을 따라 인적이 없는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다. 이윽고 다섯 개의 비닐하우스 중 세 번째와 네 번째에 도착한다. 그것들은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데, 나이 먹은 추한 쌍둥이처럼 아주 비슷하다. 둘 다 낡고 더러워서 만일 불태우려고 한다면 양쪽을 다 태워버리는 게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마지막 비닐하우스는 벌판 한가운데 있다. 완전히 방치된 비닐하우스로 거의 쓰러져 가고 있다. 벤이 말한 것처럼 누군가 태워주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직 불타지 않았다. 종수는 그 마지막 비닐하우스 앞에 서서 가쁜 숨을 내쉰다. 그리고 해미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전에는 신호가 가는데도 받지 않았는데, 이제는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 목소리가 나온다.

 

 

  집에서 혼자서 밥을 먹고 있는 종수. 소파 앞 탁자에 플라스틱 반찬통 몇 개를 올려놓고 밧그릇을 손으로 들고 밥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다. 옆에 놓인 스마트폰의 통화 버튼을 누른다. '해미'라는 이름이 뜨고 스피커폰으로 신호음이 계속 들린다. 그러나 받지 않는다. 신호음이 계속되다가 결국 소리샘으로 연결된다.

 

 

  해미의 집 앞에 종수의 차가 도착한다. 계단을 올라가 번호 키를 눌러보지만 열리지 않는다. 그 사이 암호를 바꾼 것 같다. 문을 두드려본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문에 귀를 대고 들어보기도 한다. 고양이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기도 하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다시 계단을 걸어 내려온다.

 

 

  종수가 어제와 같은 길을 달리고 있다. 새벽안개가 짙다. 안개 속에서 비닐하우스가 뿌옇게 형체를 드러낸다. 비닐하우스에 가까이 다가가는 그의 얼굴은 긴장감에 휩싸인다. 마치 순찰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것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비닐하우슬를 살핀다. 그러나 불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난 뒤 그의 얼굴은 안도감과 동시에 묘한 실망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안개 속에서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쉬지 않고 외롭고 힘든 과업을 수행하듯이.

 

 

  종수는 다시 해미의 집을 찾는다. 문은 여전히 잠겨있다. 그는 문을 두드리고 해미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문에 귀를 대본다. 안에는 분명히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계단을 내려간다.

 

 

  종수가 부동산중개소 사장과 함께 열쇠 수리공에게 번호 키로 된 현관 자물쇠를 열도록 하고 있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건물주 대신 건물의 관리르 맡고 있다는 중개소 사장은 집주인이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이런 소란을 부리는 것이 못마땅한 것 같다. 그러나 종수는 문을 열어서 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않으면 굶어죽게 된다고 설득을 계속한다.

 

 

  결국 그들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보일이가 방 안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더욱 날카롭게 울어댄다. 종수가 먹이그릇에 먹이를 놓아주자, 금방 나타나 먹기 시작한다. 아마 그 동안 오래 굶은 것 같다. 방 안은 의외로 깨끗이 정리돼 있다. 부동산 사장은 방 안이 정리된 걸로 봐서 어디 여행이라도 간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종수는 이런 방 풍경이 왠지 섬뜩하고 불길하게 느껴진다. 해미가 아프리카에 갔을 때에도 그는 어지럽혀진 방을 치우고 싱크대에 쌓아둔 그릇들을 설거지까지 해었다. 더구나 해미의 여행가방은 그대로 있다.

  부동산 사장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는 해미의 실종에 대한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방 안을 뒤진다. 방이 워낙 좁아서 뒤질 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 노트북을 열어 이것저것 살펴보기도 하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별로 없다. 부동산 사장이 감시하듯 종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

 

 

  집에 돌아온 종수는 낡은 책장을 뒤져 자신의 초등학교 앨범을 찾아낸다. 앨범을 넘겨 그 안에서 해미의 사진을 찾아낸다. 어느 운동회 날 다른 아이들과 함께 찍혀있는 운동복 차림의 어린 해미가 종수를 쳐다보고 있다.

 

 

  종수는 어느 지자체에서 하는 축제 행사장에 와 있다. 행사장 입구에 늘어선 젊은 여자 도우미들이 흥겨운 음악에 맞춰 같은 동작으로 춤을 추고 있다. 종수는 근처에 있는 승합차를 찾아가서 도우미들을 데리고 온 이벤트 용역회사의 '실장님'을 만난다. 종수가 실장에게 해미의 소식을 아는지 몯자, 실장은 오히려 해미가 연락도 없이 일을 나오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고 있다며 화를 낸다.

  종수는 자신의 픽업트럭에 앉아 행사장 입구의 나레이터 모델들을 보고 있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짙은 화장을 한 열 명이 넘는 젊은 여자들이 음악에 맞춰 쉬지 않고 몸을 흔들고 있다. 그녀들은 모두가 해미 같고, 그러나 아무도 해미가 아니다. 종수는 자신이 해미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가 하는 의심에 빠져든다.

  행사장의 음악이 계속 되는 동안, 종수는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고 있다. 해미의 인스타그램이 화면에 뜬다. 그녀의 일상을 담은 다양한 사진들이 올라와 있고, 사진에는 짧은 글귀가 붙어 있기도 하다. 그 중에는 종수가 공항에 데려다주던 날 찍은 셀카 사진도 있다. 미소를 짓고 있는 해미의 얼굴 뒤로 종수 자신의 얼굴도 보인다. 인스타그램 속에 남겨진 해미의 파편적인 이미지들은 아름답고 예쁘다. 그러나 그것은 광고의 이미지들처럼 텅 비어 있는 방식으로 아름답다. 그 이미지들은 대단히 익숙하면서도,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알 수 없고 낯선 것이다.

  그는 희미한 기억 속에 있는 해미의 어릴 적 모습과 최근에 자신이 만났던 해미를 연결해 보려고 얘를 쓴다. 그는 지갑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낸다. 집에 있는 앨범에서 떼어낸 해미의 초등학교 시절 사진에서 해미가 있는 부분만 잘라낸 것이다. 그는 옛날 사진 속의 어린 해미와 지금의 인스타그램 속에 있는 해미의 모습을 비교해 본다. 그것들은 도저히 연결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스마트폰 액정화면은 인스타그랜 사진 한 장에 멈춘다. 판토마임을 하는 해미의 상반신 이미지가 있고, 해시태그에 팬터마임 동호회 이름이 있다.

 

 

  어느 상가건물의 이층에 있는 공간.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팬터마임을 하고 있다.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나이의 남녀가 침묵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종수가 방 한쪽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침묵 속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벽을 더듬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공을 튕기기도 한다.

  연습이 끝난 뒤 종수는 동호회 사람들에게 해미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동호회 사람들은 해미를 잘 기억도 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아는 듯이 이야기 하지만 다른 사람과 헷갈린 것 같다. 어쨋든 종수는 이곳에도 해미가 갑자기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한다.

 

 

  그는 해미의 주미등록을 추적해서 해미의 집을 찾아간다. 해미의 가족을 만난다. 그들도 해미의 소식을 모르고 있다.

 

 

  아침 공기 속에서 추리닝 차림으로 달리기를 하는 종수. 비닐하우스 쪽으로 다가간다. 어느새 아침공기가 차가워진 듯 거친 숨과 함께 입김이 흩어진다. 비닐하우스는 그대로이다. 비닐 위에 내린 하얀 서리가 햇빛에 반짝인다. 그는 손가락으로 비닐 위의 서리를 훓어보더니,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낸다. 그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 본다. 비닐에 불이 붙기 시작하자, 얼른 꺼버린다. 숲속에서 새들이 소리 내며 날아오른다. 종수는 새들을 쫒아 허공을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본다. 왠지 무서운 느낌에 사로 잡힌다.

 

 

  차 안 운전석에 앉은 채 햄버거 같은 것을 먹고 있는 종수. 그러면서도 시선은 계속 앞쪽을 주시하고 있다. 그는 벤의 집이 있는 골목 한쪽에 자신의 낡은 차를 대놓고 앉아서 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윽고 벤의 스포츠카가 나오자, 뒤를 따라간다.

  복잡한 큰 도로에서 몇 번 놓칠 뻔하지만, 간신히 쫓아간다.

 

 

  이윽고 벤의 차는 어느 카페가 많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곳곳에 유럽식 노천카페들이나 레스토랑들이 들어서 있는 꽤 낭만적인 느낌의 골목이다. 벤의 차가 어느 카페앞에 선다.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는 벤을 보고, 종수도 가까운 유료주차장에 들어가 차를 세운다.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이윽고 차에서 내려 벤이 들어간 카페를 향해 걸어간다.

 

 

  벤은 카페 안쪽 창가 자리에서 편안한 자세로 혼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벤 형!"

  종수는 벤을 부르며 다가간다. 마치 우연히 만난 것처럼 얼굴에 반가운 표정을 하고. 그러나 그의 연기는 어쩐지 좀 어색하다. 그를 본 벤은 처음에는 놀라는 것 같지만 이내 반갑게 웃는다. 연기라면 그 쪽이 훨씬 능숙한 것 같다.

"여기 웬일이에요?"

"그냥,,,,,,, 이 앞을 지나다가 밖에 차를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 맞네요."

  벤은 미소를 띤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자리에 잠깐 앉으라고 권한다. 종수는 동행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되냐고 하면서도 맞은 편 자리에 앉는다. 차 한 잔 할 거냐는 물음에 금방 일어날 거라고 말한 뒤, 종수가 벤에게 지나가듯 묻는다.

"그런데 그..... 비닐하우스는 어떻게 됐죠?"
  벤이 입 끝에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아,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구나."

  벤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고 다시 집어넣는다.

"물론 태웠죠. 이미 깨끗하게 태웠어요. 태운다고 했잖아요."

"우리 집 근처에서요?"

"그럼, 아주 근처에서."

".....언제요?"

"그날, 그때 거기 갔다가 하루 이틀 뒤에?"

  종수는 벤이 왔다간 다음 날부터 자기가 매일 아침 집 주변의 비닐하우스들을 돌아 다니며 확인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정말 불 탄 비닐하우스가 있다면 못 봤을 리가 없다고 덧붙인다. 종수의 말에 벤의 두 눈이 빛난다. "비닐하우스들을 매일 확인했다고요?" 그는 즐거운 듯이 묻는다. "그래도 놓치셨네. 있을 수 있죠. 너무 가까워서 놓쳤을 거예요.

"이해가 안 되네요."

  한 여자가 그들 자리로 급하게 걸어온다. 아마 벤이 기다리고 있던 여자인 모양인데, 해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인다. 늦은 이유에 대한 그녀의 변명을 가로막으며, 벤은 늦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너무 가까우면 안 보일 수 있죠."

  그는 종수에게 그렇게 말한다. 마치 수수께끼를 던지는 사람 같은 미소를 띠고서. 종수는 뭐라고 반박하려 하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벤 앞에서 그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혹시 요새 해미와 연락이 돼요?"

여자와 함께 카페를 나와 자기 차로 걸어가는 벤을 따라가며 종수가 묻는다. 돌아보는 벤에게 그는 한 달째 해미와 연락이 안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벤은 자기도 그녀와 연락이 끊겼다고 말한다.

"나도 연락이 안되요. 연기처럼 사라졌어요."

그러면서 벤은 카페 앞에 세워 둔 차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종수를 쳐다본다.

"어디까지 가요?"

잠깐 망설이던 종수는 전철역까지 가면 된다고 둘러대자, 벤이 말한다.

"그럼 내가 전철역까지 태워줄게요."

"걸어가도 되요."

"그냥 타요. 전철역까지 꽤 되잖아. 오랜 만에 만났는데..... 아쉽잖아요."

  종수는 말없이 벤의 얼굴을 쳐다본다. 미소를 띠고 있는 벤의 얼굴은 여전히 선의로 가득한 것 같다.

"예, 그럼....."

  벤의 4인승 스포츠카는 투도어형이라 뒷자리를 타려면 조수석의 시트를 앞으로 접어야 한다. 벤이 차문을 열고 조수석의 시트를 앞으로 접어 종수가 뒷자리에 탈 수 있도록 해준다. 몸을 굽혀 뒷자리에 타면서 종수는 뭔가 조수석 밑으로 비져나온 것을 발견한다. 그가 뒷자리에 앉고 여자는 조수석에 앉은 뒤, 차는 출발한다.

 

 

  운전을 하면서 벤은 해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해미가 두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여행을 갔을 가능성, 해미의 형편, 그녀에게 돈이 얼마나 있는지 등등. 해미에 대한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벤은 옆에 앉은 여자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종수의 시선은 벤이 눈치 채지 않게 조수석과 차문 사이의 좁은 틈에 가 있다. 조수석 밑에 떨어진 물건의 한 부분이 삐져나와 있는데, 형광빛 연두색의 그것은 손목시계의 시계줄 끝부분처럼 보인다. 종수는 눈치 채이지 않도로고 애를 쓰면서 발로 그것을 빼내려고도 하고, 팔을 뻗어보기도 하지만 쉽지 않다. 조금 나왔는가 하면 안으로 더 들어가버리곤 한다. 백미러에 비친 벤의 눈을 계속 쳐다보면서, 간신히 그는 손끝으로 그것을 좀 더 밖으로 꺼낸다. 낯익은 여자용 연두색 손목시계다. 언젠가 자신이 해미에게 준 손목시계가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집어 들 수는 없다.

 

 

  벤이 전철역 앞에 차를 세운다. 그리고 굳이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여자가 차에서 내린 뒤 시트를 접어서 종수가 내리도록 해준다. 다시 여자가 타자 그는 운전석으로 돌아간다. 차를 출발시키며 벤은 미소 띤 얼굴로 친한 친구에게 하듯이 손을 흔들고, 종수는 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멀어지는 벤의 차를 보고 있던 종수가 손을 펴보면, 손바닥에 해미의 손목시계가 있다. 손목시계를 보는 그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다.

 

 

  집 마당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종수. 머리 위의 물푸레나무를 쳐다보고 있다. 전에 해미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고개를 숙여 손에 들고 있던 해미의 시계를 들여다 본다. 이윽고 그것을 자기 손목에 찬다.

  그는 마당 한쪽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로 걸어간다.

  창고로 쓰이는 컨테이너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축사료와 각종 농기구 같은 것들이 보인다. 벽 한쪽에 두꺼운 천으로 된 공구 주머니가 걸려 있다. 갈고리, 펜치,망치와 다양한 칼도 있다. 그는 그 중에서 망치 하나와 칼을 꺼내 들고 컨테니러를 나온다. 차 문을 열고 대시보드 안에 집어 넣어둔다.

 

 

  종수는 벤의 집 앞 골목에 자신의 낡은 픽업트럭을 세워두고 벤의 집 쪽을 보고 있다. 골목 저쪽에서 경찰 순찰차 한 대가 다가온다. 긴장하는 종수. 종수 차 옆을 지날때 내려진 차창으로 수상해 하는 시선으로 경찰관들이 종수를 본다. 종수는 백미러로 경찰차를 계속 주시한다. 골목 끝에서 순찰차가 차를 돌려 다시 이쪽으로 오려는 것 같다. 종수는 시동을 켜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난다.

 

 

  큰 도로로 나오려던 종수가 백미러를 쳐다보면, 뒤에서 벤의 스포츠카가 골목을 나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종수는 도로 가에 잠깐 차를 정차 시켰다가, 벤의 차가 지나가자 뒤를 따른다. 계속 벤의 차를 주시하며 따라가는 종수. 카오디오를 켜면, 마일스 데이비스의 'lift to the scaffold'가 흘러나온다. 언젠가 해미가 그것에 맞춰 팬터마임을 했던 바로 그 음악이다.

  벤의 차를 따라가는 종수의 시점. 계속 벤의 차를 따라가고 있다. 번잡한 도로에서 다른 차들이 끼어들어 놓치고 만다. 계속 차들을 지나치며 찾는다. 이윽고 가까스로 다시 발견한다.

 

 

  어느새 그들은 자유로에 들어서 있다. 종수는 계속 앞에 달리는 벤의 차를 주시하고 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하듯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는 벤의 차. 종수가 엑셀을 밟으며 따라가 보지만, 벤의 스포츠카는 차선을 이리저리 바꾸며 다른 차들을 추월하여 금새 눈앞에서 사리지고 만다.

 

 

  편의점 앞에서 빵을 먹고 있는 종수. 간간이 우유도 먹는다. 빵을 씹으며 옆 건물을 쳐다본다. 이층에 환하게 불이 켜진 헬스장이 보인다. 통유리로 된 창가에 나란히 줄지어 런닝머신 위를 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역광으로 보인다. 아래 쪽에서 앙각으로 쳐다보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허공 속을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계속 그쪽에 시선을 주며 빵을 씹는 종수의 얼굴. 무표정하다. 

 

 

  헬스장 안. 벤이 런닝머신 위를 뛰고 있다. 목 둘레의 회색 러닝셔츠가 땀으로 젖어 있다. 그러나 달리는 동작은 경쾌하고 표정도 평온하다.

 

 

  제자리를 뛰고 있는 벤의 뒷모습 너머로 유리창을 통한 야경이 보인다. 차들이 곽 메운 길과 건너편의 환하게 불을 켠 가게의 진열창들, 그리고 전철역에 드나들거나 길에서 택시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것은 마치 그가 감상하는 대형 스크린 같다.

 

 

  햇살이 기울어지기 시작한 오후의 지방도로를 달리고 있는 종수. 앞 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주시하고 있다. 벤의 차가 앞에서 달리고 있고, 꽤 거리를 두고 종수의 차가 따라가고 있다.

 

 

  나지막한 산을 오르는 한적한 시멘트 도로. 땅거미가 져서 산 전체가 그늘에 덮여 있다. 종수의 차가 천천히 올라온다. 저만치 길가의 공터에 벤의 차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긴장하는 종수의 표정. 그는 속도를 줄이고 주위를 살피다가 샛기로 들어간다. 숲 사이의 후미진 곳에 정차한 뒤, 차에서 내린다. 주위가 너무 조용해서 차문 닫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풀숲과 나무들을 헤치며 조심스럽게 벤의 차가 있던 쪽으로 다가가는 그의 얼굴은 점점 의심과 긴장에 휩싸인다.

 

 

  산 중턱에 있는 작은 저수지. 주변은 짙은 산그늘에 덮여 있고, 저수지의 수면에만 저녁하늘이 담겨 거울처럼 밝게 빛나고 있다. 아주 평화롭고 고즈넉한 분위기다. 저수지 둑 위에 벤이 서서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다. 

  벤의 얼굴은 평온하다. 그는 혼자 이 저녁녘의 호젓한 평화와 아름다움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저수지 수면에 고기들이 튀어 오르면서 내는 물소리가 들릴 뿐, 주변은 너무나 고요하다. 벤은 가끔 작은 돌을 집어서 저수지 수면에 던지기도 한다. 

  그런 벤의 모습을 숨을 죽인 채 지켜보고 있는 종수.

 

 

  어두워진 강남의 밤거리. 종수가 여전히 벤의 차 뒤를 따르고 있다. 밤 시간의 도로는 몹시 혼잡하다. 벤의 차가 청담동 어느 좁은 도로에 들어선다. 양쪽에 차들이 빈자리 없이 주차되어 있는 도로를 들어가던 벤의 차가 어느 술집 앞에 멈추자, 발레파킹 일을 하는 젊은 남자들이 쫒아 나온다. 뒤를 따르던 종수는 멀찌감치 차를 멈추고 지켜보고 있다. 발레파킹 남자들은 벤을 원래 잘 아는 듯이 허리를 굽혀 벤에게 인사하고 한 녀석이 벤 대신 차에 올라탄다. 벤이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추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종수는 천천히 차를 몰고 그쪽으로 다가간다. 종수의 낡은 픽업트럭은 누가봐도 이 구역에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벤이 어디로 들어갔는지 보기 위해서 차를 세우고 있는 동안, 누군가 차 범퍼를 두드리며 소리친다.

"여기 세우면 안 돼! 차 빼요, 빼!"

종수는 뭐라고 대구하지 못하고 그들을 쳐다본다. 녀석이 다시 소리친다.

"차 빨리 빼란 말이야! 안 들려?"

종수가 여전히 말없이 노려보고 있자, 녀석이 발로 범퍼를 차며 소리친다.

"씨발, 뭘 봐?"

계속 말없이 보고 있는 종수. 그가 계속 범퍼를 찬다.

"뭐 해? 차 빼라고!"

  종수는 몸을 굽혀 대시보드를 열고 망치를 꺼내 손에 든다. 그리고 차문을 열고 내린다. 망치 든 손을 뒤로 감추고 그에게 다가간다.

"뭐? 뭐라 그랬어?"

"빨리 차 빼라고, 씨발!"

  그가 사나운 눈길로 종수에게 다가온다. "뭐야? 왜 그래?" 또 한녀석이 다가온다. 망치를 들고 등 뒤로 돌리고 있는 종수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건물 입구에 있던 벤이 다투던 소리에 이쪽을 본다. 발레 파킹 하는 남자들 쪽으로 다가가는 종수.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순간이다. 벤이 소리친다.

"종수씨! 왜 그래요?"

  종수가 벤을 돌아본다. 두 놈도 벤을 보더니, 인사하며 말한다.

"사장님 아시는 분이세요?"

"예, 나하고 같이 온 손님이에요. 그 차 발레 좀 해주세요."
  벤의 손님이라는 말에 두 남자가 당황한다. 벤이 종수에게 웃으며 손짓한다.

"종수씨, 차 키 맡기고 얼른 이리 와요."

종수는 자기 차로 가서 문을 열고 뒤춤에 감추고 있던 망치를 집어넣고 차 키를 빼서 녀석에 건네준다. 녀석은 어색한 웃음을 띠며 열쇠를 받는다.

"진작에 이야기하시지."

  종수는 벤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종수에게 어쩐 일이냐고 묻고, 종수는 근처에 약속 때문에 왔는데 주차문제로 시비가 붙었다고 변명한다. 벤은 이왕 저 사람들에게 차를 맡겼으니, 잠깐 술 한 잔 하고 가라고 말한다. 이상하게도 벤은 종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속아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벤을 따라 술집 안으로 들어온 종수. 벤은 어두운 복도를 이리저리 꺽고 들어가더니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방 안에는 지난번 해미와 같이 만났던 친구들 일고여덟 명이 앉아 있다. 누군가 종수를 알아보고 아는 척하기도 한다. 그들 가운데 며칠 전 벤과 함께 만났던 젊은 여자(연주)가 앉아 있다. 종수는 어색하게 끝에 있는 빈자리에 앉고 벤은 연주의 옆 자리로 가서 앉는다. 예전에 해미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왠지 이 자리에 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연주는 자신이 만났던 이상한 중국인 관광객들이 이야기를 신나게 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아마도 중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면세 스토어 같은 곳에서 일하는 모양인데, 벤의 친구들은 그녀의 이갸리를 들으며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다. 사람들의 웃음에 그녀는 더욱 고양되어서 우스꽝스러운 중국어 발음을 섞어서 더욱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다. 벤은 말없이 미소를 띤 채 그녀의 옆에 앉아 있다. 모두가 웃고 있지만, 종수만은 웃지 않고 있다.

  종수는 계속 벤을 보고 있다. 벤이 문득 그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종수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보고만 있다. 벤이 시선을 돌린다. 그래도 계속 벤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 종수. 벤은 종수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소만 짓고 있다. 다른 사람이 약간 이상하다는 듯 종수를 힐끔 본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오는 종수. 벤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자리에 앉아 있다.

 

 

  의정부 지방법원 고양지원. 종수가 재판정 출입구의 벽에 붙은 게시판을 보고 재판정에 들어간다. 다른 방청객들 사이에 앉아 있는 종수. 비슷비슷한 재판들이 연이어 열리고 있다. 변호인석에 지난번에 만났던 변호사가 앉아 있다. 황색 수인복을 입은 아버지가 교도관에 이끌려 들어선다. 종수와 눈이 마주친다. 결심공판이라 곧장 판사가 판결을 내린다. 판결문을 단조로운 목소리로 길게 낭독하는 판사. 결국 아버지에게는 형법 제 136조 1항에 의해 특수공무집행방해죄, 형법 제260조 1항의 폭행죄에 의해 징역 2년이 선고된다. 판결이 끝나고 다른 죄수들과 함께 줄지어 법정을 걸어 나가는 아버지를 말없이 보고 있는 종수.

 

 

  종수의 집 축사. 동네 이장과 함께 온 소장수가 종수의 소를 데리고 축사를 나간다. 소장수는 축사 앞에 세워둔 트럭의 짐칸에 소를 태우고, 소는 별 저항 없이 순순히 트럭에 오른다. 종수가 트럭 위의 소를 쳐다본다. 소가 종수를 향해 인사라도 하듯 물기어린 눈망울을 꿈벅거리며 가는 울음소리를 낸다.

 

 

  해미의 방. 보일이가 침대 밑에서 코끝만 내놓고서 먹이를 먹고 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누군가의 시점으로 보이는 남산의 전망대. 뾰족하게 솟은 전망대의 유리창에 햇빛이 반사되고 있다.

  침대에 모로 누워 있는 남자의 다리를 여자의 다리가 뒤에서 감싸고 있다. 남자의 바지가 무릎쯤에 걸쳐져 있고, 카메라가 천천히 올라가면 남자의 등 뒤에 여자가 바짝 붙어 누워있고, 남자의 허리를 돌아간 여자의 손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핸드잡을 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카메라가 천천히 올라가면 남자의 등 뒤에 꼭 붙어 있는 해미를 볼 수 있다. 그녀의 얼굴은 종수의 뒷머리에 바싹 붙어 있고, 약간 벌린 입이 종수의 귀에 닿아 있다. 그 자세로 그녀는 계속 손을 움직이고 있다. 방 안의 정적 속에 들릴락 말락 핸드잡 하는 마찰음과 두 사람의 여린 숨소리만 들린다. 해미는 종수를 위해 최선을 다해 핸드잡을 해주고 있다. 이윽고 아주 힘들게 절정에 이르는 종수 .그가 사정하자, 해미가 동작을 멈춘다. 그년는 종수의 머리에 얼굴을 붙인 채 그가 느끼는 것을 똑같이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종수는 그 자세 그대로 창문 밖을 보고 있다. 창문 너머 보이는 남산 전망대의 유리창에 햇빛이 무심히 반사 되고 있다.

  해미의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 있는 종수. 반쯤 내려진 바지가 무릎에 걸쳐져 있고 태아처럼 다리를 구부리고 있는 아까의 자세 그대로이지만, 해미 없이 혼자 누워있다. 해미가 가고 없다는 참을 수 없는 공허감이 그를 사로잡고 있다. 그의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자기 집 욕실의 거울 앞에서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있는 벤. 욕실은 화사하게 밝고 깨끗하다. 드라이를 끝내자, 그는 얼굴에 스킨토너를 두드리고 다시 로션을 바른다. 그의 시선은 시종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고정되어 있다. 분명 거울 속의 자신에 대한 자기애적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그의 표정은 왠지 몹시 진지해 보이고 동시에 뭔가 아주 즐거운 일을 앞두고 있는 것 같은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다. 이제 그는 왁스로 머리르 정성들여 고정시킨다. 이윽고 자신의 치장을 완전히 끝낸 뒤 그는 세면대 선반 한쪽에 놓인 가죽 케이스를 들고 욕실을 나간다. 

 

 

  베란다 창으로 햇볕이 들어오는 거실 바닥에 연주가 앉아 있고 벤이 그 앞에 앉아서 화장을 해주고 있다. 그의 옆에는 화장 케이스가 있다. 벤의 손 놀림은 전문가의 그것처럼 섬세하면서도 익숙하다. 집안에는 경쾌하면서도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분 바른 여자의 얼굴에 부드럽게 볼터치도 하고 아이섀도도 그리고, 눈썹도 그린다. 그의 얼굴은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진지하지만, 또한 좋아하는 것을 하는 즐거움도 숨기지 못하고 있다. 말없이 자신의 얼굴을 맡기고 있는 연주 또한 이 모든것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핸드폰 벨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벤은 무시하고 화장을 계속한다. 작은 붓으로 여자의 입술에 릭스틱을 바른다. 붉게 칠해진 여자의 입술에 간질이듯 후 가늘게 숨을 분다. 여자의 입술이 웃음을 참는다. 핸드폰 벨이 계속되자, 벤은 몸을 돌려 테이블에 놓인 전화기를 들어본다. 발신자를 확인한 뒤 전화기를 놓고 다시 화장을 계속한다. 전화벨은 계속 된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의 어느 황량하게 보이는 벌판. 오래 쓰지 않고 버려진 듯한 낡고 때 묻은 비닐하우스 몇 동이 보인다. 벌판 사이의 비포장도로로 차 한대가 다가온다. 이윽고 가까 와서 서면 벤의 은색 스포츠카임을 알 수 있다. 벤이 차에서 내려 흥미 있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고, 비닐하우스 쪽도 바라본다. 시계를 보는 걸 보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잠시 후 저쪽에서 차가 한 대 나타나서 다가온다. 종수의 낡은  픽업트럭이다. 벤은 약간 긴장된 시선으로 다가오는 종수의 차를 보고 있다. 저만치 떨어져서 차가 선다. 차는 선 채 그대로 있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차 앞 유리창은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반사하여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을 볼 수가 없다. 그것을 보고 있는 벤. 이윽고 차문이 열리고 종수가 내리더니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한다. 벤의 굳은 표정이 풀어진다. 

"어, ......종수씨!"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는 종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선의가 가득하다.

"여기 비닐하우스 참 많네요."

  다가오는 종수의 얼굴에도 웃음기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어쩐지 그 웃음은 좀 어색하다.

"......해미는 어딨어요?"

"......해미요?"

  가까이 다가온 종수가 조용히 반문한다.

"해미하고 같이 보자고 했잖아요. 해미 같이 안 왔어요?"

"......"

  말없이 종수는 벤을 쳐다본다. 뭔가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그를 사로잡는 것 같다. 문득 구가 손을 앞으로 내밀고, 벤이 그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느닷없이 종수는 벤을 찌른다. 미처 놀랄 틈도 없이 한번, 두 번, 세 번 연거푸 복부를 찌른다. 결국 벤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더니 땅바닥에 쓰러져 눕고 만다. 그의 텅 빈 눈이 종수를 쳐다본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다. 피 붇은 칼을 손에 든 채 종수는 거친 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직 그는 극도의 흥분상태에 있다. 눈은 여전히 종수를 향해 치켜뜨고 있지만, 벤의 몸은 이제 움직임이 없어진 것 같다.

  종수는 벤의 차 운전석 문을 열고, 벤의 몸을 뒤에서 잡고 차 안으로 넣으려고 한다. 운전석에 앉히려고 애를 쓰지만, 벤의 몸이 무거워서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먼저 상체부터 힘들게 끌어올린 뒤, 하체를 안으로 밀어 넣는다. 간신히 운전석에 앉히고 몸을 떼는 순간, 벤이 그의 몸을 붙든다. 종수는 벤을 밀어내려고 하고, 벤은 죽어가면서도 필사적인 힘으로 종수를 놓지 않으려 한다. 두 사람은 마치 서로 부둥켜안은 듯한 자세로 씨름을 한다. 힘으로 벤의 손을 풀려다말고 종수는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마침내 벤의 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한다. 벤의 몸을 떼어놓고 일어서는 종수의 옷은 온통 피로 젖어 있다.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종수는 고개를 꺽고 운전석에 앉아 있는 벤을 내려다보다가, 자기 차로 걸어간다. 차에서 플라스틱 통을 꺼내 들고 걸어온다. 뚜껑을 열고 통에 든 휘발유를 벤의 몸에 붓는다. 뒤이어 차 안 여기저기 휘발유를 뿌린 뒤 빈 통을 차 안에 던져 넣는다. 차 문을 닫으려다가, 피에 젖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고는 옷을 벗기 시작한다. 윗옷을 벗어 던져 넣고, 피 묻은 바지도 벗어 던진다. 잠깐 망설이다가 속옷까지도 다 벗어 던져 넣는다. 이윽고 그는 완전히 벌거벗은 몸이 되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여 차 안으로 던져 넣고 문을 다는다. 그리고 자기 차로 걸어가서 차에 올라탄다.

  차에 탄 채로 종수는 잠시 앞을 보고 있다. 벌거벗은 채로 아직도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차창 유리창이 점점 밝아진다. 이윽고 차창에 솟구치고 있는 불길이 비친다. 그것을 보고 있다가 이윽고 종수는 차를 출발시킨다.

  불길에 휩싸여 타고 있는 벤의 스포츠카. 종수는 계속 백미러에 비친 그 불길을 쳐다보고 있다. 멀어지는 불길을 보며 그는 카오디오를 켠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Lift to the Scaffold'가 흘러나온다. 종수의 얼굴이 차츰 평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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